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200억 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안정적’이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얇은 긴장감이 흐른다. 미 연준의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달러 강세가 지속되고, 원·달러 환율은 1,400원선을 넘나들고 있다. 정부는 “위기 때보다 충분하다”는 입장을 내놓지만, 시장은 달러 유동성의 압박을 체감하고 있다. 표면적 지표와 체감 사이의 괴리, 그것이 지금 한국 외환시장의 본질이다.
문제는 ‘보유고의 질’이다. 4,200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은 미국 국채, 유럽채, 기관예치 형태로 묶여 있어 즉시 현금화 가능한 달러 비중이 높지 않다. 글로벌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질수록 채권 평가손이 발생하고, 외환보유액은 장부상 숫자만 유지된 채 실질 가치가 떨어진다. 다시 말해 ‘있어 보이지만 당장 쓸 수 없는 달러’가 많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화자산 중 현금성 유동자산은 전체의 20~25% 수준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외환보유액이 4천억 달러를 넘는다고 해도 실제 시장에서 쓸 수 있는 달러는 훨씬 적다”며 “단기 자본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작은 외화 유출 충격에도 시장은 과민하게 반응한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단기 채권·주식시장에서 빠져나가거나, 대기업들의 해외 투자·배당이 집중되는 시점이 겹치면 단기 달러 수급이 빠듯해진다. 최근 몇 년간 기업들의 해외 설비투자, IRA(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에 따른 미국 내 생산 이전 등은 실질적으로 달러 유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달러는 보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달러가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때마다 거론되는 해법이 ‘한·미 통화스와프’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미 스와프 체결은 한국 금융시장의 공포를 단숨에 진정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미국은 ‘글로벌 달러 유동성 공급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되, 스와프 체결의 대가로 경제·안보적 이해를 요구한다. 최근 IMF가 제시한 ‘다자형 스와프 네트워크’ 구상 역시 표면적으로는 신흥국 지원이지만, 실상은 미국 중심의 금융안전망 확대에 가깝다.
IMF의 구조는 언제나 ‘지원’이 아니라 ‘조정’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은 IMF의 긴급자금을 받았지만, 고금리·구조조정·시장개방이라는 처방이 뒤따랐다. 외환유동성 위기는 잠재적이지만, 미국과 IMF의 정책 영향력은 늘 현실적이다.
서울대 국제금융학과 김모 교수는 “달러 패권 질서가 유지되는 한 IMF 스와프 체계는 실질적으로 미국의 정책 연장선에 놓인다”며 “달러 유동성 확보를 위해 외환보유액만 키우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외환보유액의 절대 규모보다 구조적 자산 구성, 즉 ‘얼마나 빨리 달러로 전환 가능한가’가 진짜 안정성을 결정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는 한국의 무역·외환 구조를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미 행정부는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핵심 산업에 자국 내 생산을 요구하며, 한국 기업들의 달러 지출을 늘렸다. 수출은 줄고, 투자는 늘고, 그만큼 외화 유출이 커진다. 이 과정에서 달러 유동성을 메우기 위한 정부의 대응 여력은 점점 줄어든다. IMF는 신흥국 중심으로 스와프 논의를 확대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달러의 ‘밸브’를 쥐고 있는 건 여전히 미국이다.
결국 ‘달러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달러를 언제, 얼마나 유연하게 조달할 수 있느냐’다. 외환보유액이 많다고 해서 위기를 막아주지 않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400억 달러였지만, 불안 심리는 며칠 만에 확산됐다. 환율은 하루 만에 100원 넘게 뛰었고, 외화표시 채권시장은 마비됐다. 지금은 그때보다 규모는 커졌지만, 구조적 의존성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정부가 ‘충분하다’는 수사를 반복할수록 시장은 불안해진다”며 “정책 커뮤니케이션보다 실질적 유동성 공급 장치, 예컨대 외화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 강화, 기업의 해외차입 분산 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환방어를 위해 금리를 올리면 내수는 위축되고, 금리를 내리면 원화 약세가 가속화된다. 한쪽을 지키면 다른 쪽이 흔들리는 전형적 ‘트릴레마’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정책과 공급망 압박까지 겹치면, 한국은 실물·금융 양면의 불안정성이 동시에 노출된다.
정부가 외환보유액의 절대 규모만 강조하며 “충분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정책적 착시다. 외환시장 신뢰는 숫자보다 ‘구조적 유연성’에서 온다. 단기 달러 조달망을 넓히고, 외환정책 투명성을 높이며, 기업·은행 간 달러 흐름의 건전성을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통화스와프 역시 ‘보험’의 개념이어야지 ‘마취제’가 되어선 안 된다. 스와프 협상이 지연될 때마다 환율이 출렁이는 구조라면, 그것 자체가 이미 위기의 신호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한·미 스와프는 언제든지 열릴 수 있는 창구로 유지하되, 특정 시기나 정치 변수에 따라 좌우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정부는 장기적으로 아시아 역내 유동성 네트워크를 강화해 달러 집중도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달러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권력’이다. 그 권력의 중심에서 미국은 무역과 금융을 동시에 통제한다. 한국이 진정한 의미의 외환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외환보유액의 규모보다 외환운용의 질, 그리고 달러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적 분산이 필요하다.
외환의 긴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위기는 언제나 눈에 띄게 온다.
굿모닝경제 김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