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2025년 3월 2030년을 목표로 내놓은 방위·안보 전략, 이른바 ‘Readiness 2030’은 단순한 군사력 증강 계획이 아니다. 이는 유럽이 오랫동안 미국과 나토(NATO)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나 독자적 방위 역량을 갖추려는 대전환의 신호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촉발한 위기, 그리고 미국 정치의 불확실성이 이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더 이상 ‘경제 공동체라는 틀만으로 시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자각이 유럽을 변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 변화가 유럽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역시 똑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 동맹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가? 미국의 전략적 계산이 변할 경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Readiness 2030’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각국이 따로 무기를 사들이던 방식을 버리고, EU 차원의 공동 조달을 확대한다. 둘째, 드론·사이버 방어 같은 첨단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방위산업 투자를 강화한다. 셋째, 특정 위기 때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상시적 대비태세를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EU는 나토와의 결별을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미국 중심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언제든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려 한다. 이것이 유럽식 전략적 자율성이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한미동맹이라는 견고한 틀 속에서 안보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도화되는 상황에서 독자적 억지력에 대한 요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방위력 개선과 첨단 무기 개발, 국산화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미국의 역할을 전제로 한 계산에 머물러 있다. 유럽의 ‘Readiness 2030’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동맹이 흔들릴 때,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유럽의 실험은 한국에 두 가지 메시지를 준다. 첫째, 동맹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국과의 동맹은 필수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한국 역시 자주적 방위 역량을 확충하지 않으면 외교·안보의 선택지가 극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둘째, 경제력은 안보 역량과 결합되어야 한다. EU가 군사 자급성을 추진하는 이유는 단순히 총과 미사일을 더 가지려는 것이 아니다. 산업·기술 기반이 있어야 진짜 자율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적 반도체·배터리·인공지능 강국임에도, 안보 구조에서는 여전히 외부 의존적이라는 점은 분명한 모순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와 규범의 연대다. EU는 방위·안보 논의에서도 민주적 가치와 인권을 강조한다. 이는 한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강조하는 규범 기반 질서와 맞닿아 있으며, 양측의 협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오늘날 세계 질서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러시아의 도전, 인도의 부상, EU의 자율적 방위 실험이 맞물리면서 세계 질서의 다극화(multipolarity)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런 판도 속에서 한국이 단순히 미국의 동맹국으로만 규정된다면 외교적 공간은 급격히 좁아진다. 반대로 EU와 같은 새로운 축과 전략적 협력을 확장한다면, 한국은 오히려 선택지를 넓히고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 ‘Readiness 2030’은 단순한 군사 전략이 아니라, 다극화 시대에 국가가 어떻게 공간을 확보하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EU의 ‘Readiness 2030’은 멀리 떨어진 대륙의 뉴스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내일을 비추는 거울이다. 유럽은 늦었지만 자율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한국은 아직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동맹 의존의 안락한 틀 안에 머물러 있다. “동맹을 지킬 것인가, 자율성을 확보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잘못된 질문이다. 진짜 질문은 이렇다.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지킬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한국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불확실한 세계 질서 속에서 늘 누군가의 계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EU의 선택은 불편하지만, 우리에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숙제를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