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확산은 반도체와 알고리즘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의 전력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문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두 배 이상 늘어날 수 있으며, 일부 국가는 전체 전력 수요의 10~12%를 데이터센터가 차지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AI의 미래는 곧 연산 능력의 경쟁이자 전력과 공간의 경쟁이다.

미국은 전력 확보를 AI 경쟁의 핵심으로 본다. 북버지니아의 데이터센터 공실률은 1% 미만이고, 건설 18~24개월 전부터 임대 계약이 끝나는 선임대 경쟁이 일상이다. '짓고 나서 고객을 받는다'는 공식은 이미 무너졌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렌(IREN)이라는 데이터센터 기업이 2.75GW 규모의 전력망 계약을 확보한 것은 단순한 기업 뉴스가 아니라 전력 패권 경쟁의 신호탄이다. AI 인프라의 본질은 서버랙이 아니라, 서버를 돌릴 수 있는 구속력 있는 전력 계약이다.

유럽은 규율과 분산, 사회적 기여를 우선한다. 전력망 접속은 권리가 아니라 조건부 허가다. EU는 ‘그리드 행동계획’을 통해 송전망 확충과 접속 지연 해소를 추진하고, 전력시장 설계 개편으로 장기 전력조달계약(PPA: Power Purchase Agreement, CfD: Contract for Difference)을 활성화했다. 하지만 각국은 구체적 조건을 달리한다.

독일은 2023년 에너지효율법(EnEfG)을 제정해, 재생에너지 100% 사용·전력사용효율(PUE) 1.2 달성·폐열 회수를 충족해야 접속을 허용했다. 아일랜드는 더블린권 포화로 2021년부터 신규 접속을 중단했고, 그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전 승인 프로젝트가 가동되며 2023년에는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국가 총수요의 21%에 도달했다. 이후 자가발전·저장·사설송전망(private wires) 같은 조건을 갖춘 경우에만 예외를 허용한다. 유럽연합 회원국은 아니지만 영국은 ‘큐 정리 개혁’으로 선착순 대신 “준비된 자 우선” 원칙을 적용했다. 네덜란드는 도시권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금지하고, 지정된 특정 지역에서만 허용한다. 북유럽은 폐열을 지역난방망에 공급해, 데이터센터를 지역사회 기여자로 재포지셔닝했다. 이 모든 접근은 하나의 철학으로 수렴한다. 데이터센터는 전력망과 지역사회에 기여해야만 정당성을 갖는다.

한국은 미국과 유럽 사이에 있다. 데이터센터 전력소비는 국가 총수요의 3~4% 수준이지만, 서울·수도권에 집중돼 송전망 포화와 주민 반발이 이미 나타난다. 정부는 두 가지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첫째,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으로 초고압 송전망 건설 기간을 단축한다. 둘째,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으로 비수도권 유치 인센티브와 사설 배전망을 허용한다. 2025년부터는 1,000㎡ 이상 신규 데이터센터에 제로에너지건축물(ZEB: Zero Energy Building) 인증을 의무화해 효율성을 강화한다. 그러나 아직 효율·폐열 회수·자가전원 같은 사회적 기여를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미국은 전력 선점으로 패권을, 유럽은 규제와 조건부 접속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 한국은 갈림길에 서 있다. 수도권 집중을 그대로 두고 송전망만 확충하는 방식은 곧 한계에 봉착한다. 아일랜드처럼 조건부 접속, 독일처럼 효율·재생·폐열 제도화, 북유럽처럼 지역사회 거래 설계가 없다면 한국 역시 병목과 사회적 반발에 직면할 것이다.

AI 시대의 전력–데이터 인프라는 더 이상 산업의 부속물이 아니다. 국가 에너지 체계와 사회적 합의를 재편하는 핵심 변수다. 한국이 지금 필요한 건 접속을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조건부 사회적 계약으로 재정의하는 일이다. 그래야 데이터센터는 한국 전력망의 부담자가 아니라 기여자가 되고, 글로벌 AI 경쟁에서도 지속가능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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