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유럽연합(EU)이 발표한 2028~2034년 다년도 재정계획(MFF: Multiannual Financial Framework) 초안은 유럽의 재정구조와 시장 환경에 커다란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EU가 새롭게 도입하려는 ‘유럽을 위한 기업 기여금(CORE: Corporate Resource for Europe)’ 제도는 단순한 조세 제도를 넘어선다. 이것은 EU가 재정 주권(Fiscal Sovereignty)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는 정치경제적 장치이며, 동시에 시장에 기초한 통합의 한계를 넘어 공공재 중심의 연합 질서로 전환하고자 하는 유럽의 선언이기도 하다. 브뤼셀 정책가들 사이에서는 이를 “연대의 재정화(Financialization of Solidarity)”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럽 언론과 전문가들은 CORE를 단지 대기업을 겨냥한 과세 조치로 보지 않는다. 르 몽드(Le Monde)는 이 제도를 “시장 자유화 이후 30년, 유럽이 다시금 공공의 이름으로 거버넌스를 재정립하는 계기”라고 분석했고, 슈피겔(Der Spiegel)은 “CORE는 EU가 더 이상 국가 정부들만을 통한 ‘재분배 메커니즘’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구조적 메시지”라고 논평했다. 특히 EU의 기존 예산이 전적으로 회원국 분담금에 의존하는 구조였다는 점에서, CORE는 초국적 통치체제가 자체 재원을 마련하려는 첫 실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CORE의 핵심은 ‘공간적 과세권’의 확장이다. 다시 말해, EU는 이제 물리적 본사가 아니라, 경제적 활동이 발생하는 곳, 즉 시장을 기준으로 과세 정당성을 주장하려 한다. 이는 유럽 내에서도 논쟁적인 지점이다. CORE가 단지 기업을 압박하는 조세가 아니라, 유럽이라는 정치 공동체 안에서 경제주체가 응당 져야 할 민주적 책임의 일환으로 인식되기를 EU는 바라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단순한 조세가 아니라, ‘책임(responsibility)’에 관한 문제다. 유럽 집행위의 재정담당 부위원장 요하네스 한(Johannes Hahn)은 CORE를 발표하며 “이제는 대기업도 유럽이라는 공공 플랫폼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곧, 단일시장에서의 자유로운 이익을 누리는 기업이라면, 그 대가로 일정한 공공 기여도 감수해야 한다는 정치적 윤리를 제도화하려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와 공공 책임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는 움직임이다.

EU가 이 제도를 통해 실질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단지 미국 빅테크나 아시아 대기업이 아니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회원국 간 재분배를 넘어서, 유럽 시민 전체를 아우르는 ‘재정 공동체(Fiscal Community)’를 지향하는 실험으로 해석된다. 그 실험이 성공한다면, 유럽은 사상 최초로 시장 주체를 직접 과세하는 초국가적 공동체로 진화할 가능성마저 있다. CORE에 대한 반발도 분명 존재한다. 일부 회원국은 기존의 법인세와의 충돌을 우려하며, 기업계는 ‘정치적 과세’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럽 내부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EU의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즉 대외 의존도를 줄이고 독립적인 정책 실행 능력을 확보하려는 흐름은 재정구조 개편과도 맞닿아 있다

이처럼 CORE는 단순한 조세가 아니다. 그것은 EU이 다시금 자신을 ‘공동체’로 정의하기 위한 예산적, 철학적 실험이다. 한국 기업은 단순히 부담을 최소화하는 대응을 넘어, 이러한 유럽의 흐름 속에서 ‘공공 책임’과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야 한다. CORE는 단기적으로는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럽의 가치에 공감하고 ESG 경영을 내재화한 기업에게 새로운 기회와 파트너십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

CORE는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니다. EU는 ‘유럽 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기업이라면, 유럽 사회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을 제도화하려 한다. 따라서 한국 기업은 앞으로 유럽 내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단순히 가격경쟁력이나 기술력뿐만 아니라, 지속가능경영, 환경 규제, 공급망 관리까지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CORE는 단지 유럽의 조세 항목이 하나 추가된 것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제도 환경이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한국 기업은 지금 이 변화의 흐름을 읽고, 단기적 부담을 넘어 장기적인 기회로 전환할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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