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은 단순한 국가 간 협력을 넘어, 시민 개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초국가적 정치 실험을 지속해왔다. 그 대표적 성과가 바로 ‘에라스무스 세대(Erasmus Generation)’이다.

이종서 EU정책연구소 원장
이종서 EU정책연구소 원장

1987년 시작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유럽 대학 간 교류를 통해 청년에게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유럽적 정체성을 생활 양식으로 체득한 세대가 탄생했다. 이들은 자유로운 이동, 다문화적 일상, 초국가적 연대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여겼으며, ‘유럽 시민성’의 구현체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이 정체성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뒤틀리고 있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30세 이하 청년의 극우 정당 지지율은 일부 국가에서 30%를 넘었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는 이른바 에라스무스 세대가 극우 포퓰리즘의 핵심 지지층으로 부상했다.

이는 단순히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현상이다. 유럽통합을 일상 속에서 경험한 세대가 그 통합을 부정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정체성의 불일치와 소속감의 재편성이다. 에라스무스 세대가 경험한 유럽은 도시, 중산층, 고등교육을 중심으로 설계된 공간이다. 하지만 유럽 청년 다수가 그 혜택의 외곽에 위치한다. 유럽 시민성은 실제로는 계층적·공간적 경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외부에 있는 청년들은 ‘포함되지 못한 자’로서의 박탈감을 경험했다.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불평등을 유럽 통합 전체를 아우르는 이상과 역사적 흐름, 초국가적 정체성, 공동체 형성 등 유럽 프로젝트(European Project)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며, 초국가적 연대보다는 민족적 보호주의 언어에 더 쉽게 반응하게 된다.

둘째, 경험 기반 시민성의 탈정치화이다.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국경을 넘는 학습과 생활 경험, 즉 ‘이동성(mobility)’을 통해 개인의 자율성과 정체성 형성을 도모했지만, 이러한 경험이 곧바로 정치적 주체화를 이끌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당, 제도, 시민사회와의 접촉이 부족한 청년들은 사회운동이나 SNS 기반의 감정적 실천에 더 익숙해졌다. 이처럼 형성된 시민성은 구조적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불만과 분노의 표현에 가깝고, 그 분노는 상황에 따라 좌파적 기후운동이나 극우 정체성 정치로 급격히 전이되기도 한다.

셋째, 유럽 정치의 대응 실패다. EU는 탈탄소 전환, 이민 정책, 젠더 평등 등의 아젠다를 중심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재구성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청년 대중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특히 비도시 지역, 저소득 계층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가치가 추상적 이상으로 느껴졌고, 일자리와 주거,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유럽통합은 ‘기회의 상실’로 다가왔다. 반면 극우 정당은 ‘강한 공동체’ ‘문화적 자긍심’이라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언어로 이 공백을 채웠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에라스무스 세대’는 단일한 유럽 시민의 범주로 더 이상 묶이지 않는다. 이들은 도시와 농촌, 서유럽과 동유럽, 고학력과 비정규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위치에서 다층적이고 상충하는 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

유럽 시민성은 더 이상 진보적 연대의 보증 수표가 아니며, 그 내부의 균열은 새로운 정체성 정치의 장을 열고 있다. 이로 인해 향후 유럽 정치 지형에서 청년층은 더 이상 일관된 진보의 동력이 아니라, 급진화된 양극단 사이에서 요동치는 ‘정치적 불확실성’의 상수가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럽통합은 단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감정, 기억의 정치로 전환되고 있다. 청년이 극우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단지 ‘누구를 찍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세계를 상상하고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에라스무스 세대’의 선택은 이제 유럽 시민성의 위기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위기는, 제도의 한계보다 정체성 구성의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인 정치적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유럽의 경험이 단지 지역적 현상이 아니라, 청년층의 소외가 심화된 한국 사회에도 제도적·정체성 차원의 경고로 읽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종서 EU정책연구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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